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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와 신대륙의 발견

작성자
주스페인대사관
작성일
2009-01-27
라틴 아메리카의 탄생


  1492년은 스페인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해라고 볼 수 있다. 이사벨 여왕의 지휘 하에 국토수복전쟁이 종결되었고, 안또니오 데 네브리하라는 언어학자는 최초의 스페인어 문법서를 써서 까스띠야 왕국 중심의 근대국가 수립과 제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한편 같은 해 10월 12일에는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뱃사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다.


  국토수복전쟁을 완결한 스페인은 그 여세를 몰아 해외 식민지 건설을 꾀하고 있었으나 당시 아시아로 통하는 육로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막혀 있었고 아프리카 해안을 통한 인도양 항로 역시 이미 포르투갈에 의해 선점당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신대륙 발견은 스페인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도약대 역할을 한다. 콜럼버스는 그 뒤로도 3차례에 걸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가 중국과 일본의 황금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다. 고독하고 불우한 말년을 보낸 콜럼버스는 1506년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 땅이라고 믿었고, 이 때문에 신대륙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영광마저도 이탈리아의 아메리코 베스푸치오에게 빼앗기고 만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예수 탄생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메리카에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유럽과는 다른 양태를 보이는 수천 년의 선진문명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이질적인 문명들이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조우한 것은 지구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중해의 좁은 바닥에서 세계 패권을 운운하던 유럽인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비추어 볼때 그것은 “타자성”의 발견인 동시에 “또 다른 나”의 발견이자 잃어버린 낙원의 도래였다. 또한 식민 과정에서 스페인이 착취한 대량의 금과 은은 유럽에 들어와 자본주의의 젖줄이 되고 산업혁명의 촉매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인 근대의 개막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는 결과적으로 신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이후 유럽인에 의해 정복되고 조직적으로 식민화되어 유럽 제국주의의 단초가 되었다. 그 후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서구 세계에 신비롭고 풍요로운 이상향이 아니라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물화되어 버렸다.


이사벨 여왕은 왜 이탈리아인 콜럼버스 탐험을 지원했을까?


  리스본에서 생활하던 콜럼버스는 1477년경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토스카넬리 이론을 접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한다. 콜럼버스는 1482년 포르투갈의 국왕 조앙 2세에게 서쪽 항로개척을 위한 항해계획을 보고했으나 아프리카 항로에 더 관심이 많던 국왕은 이론적인 문제점과 막대한 자금소요를 이유로 거부한다. 같은 해에 부인이 어린 아들 디에고를 남겨 놓고 사망하자 이미 리스본에서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실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스페인으로 도피한다.


  스페인에 온 콜럼버스는 1486년 ‘가톨릭 공동왕’으로 불리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에게 탐험 계획을 제안하며 지원을 요청하는데, 처음에는 거부당하였으나 이사벨 여왕의 적극적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받아들여져 1492년 4월 17일 스페인 왕실과 정식으로 산타페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콜럼버스가 왕실에 요구한 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항해에 성공할 경우 세습귀족 자격, 해군제독 계급, 그리고 발견하는 모든 땅의 총독 겸 최고행정관의 직함을 요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새로운 땅에서 얻는 수입의 10분의 1과 무역거래에 8분의 1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자격과 권리가 후손들에게 세습되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상당히 무모한 요구였으나 당시 재정난에 허덕이던 스페인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이탈리아인이 호언장담하던 막대한 부, 즉 값싼 원주민 노동력에 의한 금은보화와 광대한 상품시장의 확보는 떨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또르데시야스 조약(1494.6.7)-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계 분할


  유럽인의 시야가 아직 지중해에 머물러 있던 15세기 중엽, 먼저 미지의 땅과 바다로 향한 것은 포르투갈이다. 엔리케 왕자는 대서양 연안의 마데이라제도와 아조레스제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세네갈, 베르데곶,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연안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게다가 1481년 교황이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있는 카나리아 제도 남쪽의 모든 땅은 포르투갈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면서 아프리카 서쪽 연안은 포르투갈의 절대 우위 지역이 되었다. 그 무렵 훗날 해양대국이 될 영국은 프랑스와 백년전쟁에 정신이 없었고, 스페인은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통일의 주역’ 이사벨 여왕이 등장하면서 식민사업을 둘러싸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양국은 소유자가 없었던 카나리아제도에서 충돌했으나 포르투갈의 패배로 카나리아는 스페인 최초의 해외 영토가 되어 오늘날까지 스페인령이다. 스페인을 통일한 1492년, 여왕이 후원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식민지 분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양국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콜럼버스와 스페인은 신대륙을 ‘미개척지 인도’라고 생각했고, 포르투갈은 ‘자국령 마데이라제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으니 중재가 필요했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교황 알렉산더 6세한테 중재를 요청하자, 교황은 1493년 5월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위치한 베르데곶(현재의 카포베르데 공화국)에서 서쪽으로 100리그(480km) 지점에 남북 직선의 ‘교황 자오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삼게  다. 그러나 주앙 2세는 교황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1년 후 스페인에 새로운 경계를 요구했다. 1494년 6월 7일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 또르데시야스에서 체결된 ‘또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때의 협상 결과물이다.


  이로써 두 해양 강대국끼리의 세계 분할선은 일방적으로 확정되었다. 경계선은 대략 브라질의 상파울루를 지나는 경도 46도 37분쯤에 해당되며, 이를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1500년 포르투갈의 카**이 브라질에 도착하고, 1531년 포르투갈의 첫 정착민이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브라질은 오늘날 남미국가 중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되었다.



중남미와 북미의 엇갈린 운명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금과 은을 비롯한 자원의 착취였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파였다. 이에 따라 신대륙으로 건너간 스페인인들은 군인을 비롯한 공무원이거나 성직자 혹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넌 모험가들이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이 초기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던 시기에 여전히 중세적 세계관을 고집하고 있던 스페인은 식민화 과정에서도 구세계의 앙시앙 레짐을 그대로 이식하였다.


  이에 따라 중남미에는 식민 모국인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권위주의 체제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스페인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은 부왕을 정점으로 대지주, 고위 성직자, 고위 군인 등이 신분 피라밋의 최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실은 중남미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행정조직으로서 멕시코시티, 산타페, 리마,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각각 수도로 하는 4개의 부왕령을 설치하였으며 교황으로부터 모든 성직자 임명권을 위임받아 신대륙의 교회 권력도 장악하였다.


  스페인의 식민통치 양태는 오늘날 북미와 중남미의 대조적인 모습을 낳았다. 같은 신대륙임에도 불구하고 중남미는 왜 북미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그토록 낙후하게 되었는가. 그 열쇠는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이 중남미에서와는 달리 유럽의 앙시앙 레짐으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체제를 수립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국인 영국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거의 가족 단위로 이주를 하여 영국의 구체제는 물론 신대륙의 원주민과도 혼종되지 않은 채 근대 세계를 건설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반해 중남미에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성들로서 구체제의 위계질서에 복속되는 한편, 원주민 여성들과 피를 섞으며 새로운 인종인 메스티소를 낳아 스페인 본국보다 더 엄격한 봉건적 신분제 사회를 만들었다. 중남미의 신분적 불평등은 오늘날까지도 구조적으로 지속되면서 사회불안의 고질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의 허무한 멸망


  카리브 섬들을 장악하고 안정된 기지를 건설한 스페인인들은 본격적인 대륙 정복에 나선다. 당시 신대륙에는 아스텍 문명이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잉카 문명이 오늘날의 페루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먼저 아스텍 정복에 나선 에르난 꼬르떼스는 11척의 배에 550명의 군인과 17마리의 말 그리고 몇 문의 대포를 싣고 멕시코 만에 상륙하여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떼노츠띠뜰란에 입성한다. 몇 차례의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꼬르떼스는 아스텍의 마지막 황제인 꾸아우떼목을 처형하고 1521년 제국을 멸망시킨다. 소규모 군대에 의해 대제국이 멸망한 데에는 아스텍과 적대 관계에 있던 주변 부족들의 도움이 컸지만 아스텍 사람들의 신화적인 믿음 역시 큰 작용을 하였다. 아스텍 부족에게는 평화의 신이며 농경을 주관하는 께살꼬아뜰 신이 있었는데 전쟁의 신인 떼스까뜰리뽀까에 패배하여 동쪽 바다를 통해 사라진다. 그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예언을 했는데 그 때가 바로 꼬르떼스가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 만에 상륙하던 시점과 일치했던 것이다. 말을 타고 나타난 꼬르떼스를 께살꼬아뜰 신과 혼동한 당시의 아스텍 황제 목떼수마는 침략자를 융숭히 대접하면서 결국은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잉카 제국의 멸망은 더욱 허망하였다. 프란시스꼬 삐사로는 불과 180명의 군인과 37마리의 말을 끌고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까하마르까에서 잉카의 황제 아띠우알빠와 조우한다. 삐사로는 수천 명의 전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아띠우알빠를 대담하게 사로잡아 볼모로 삼는다. 삐사로는 한 방을 가득 채울 만한 황금을 바치라고 요구하지만, 황금만 받고는 결국 아따우알빠를 처형함으로써 1533년 잉카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잉카 제국의 멸망에도 잉카인들 자신이 화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아따우알빠는 아버지로부터 황제 자리를 이어받은 친형제 우아스까르에 반기를 들고 오랜 내전을 겪은 뒤에 황제로 즉위한 인물이었기에 제국 전체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잉카인들의 잘못된 믿음도 큰 원인을 제공한다. 즉 잉카인들은 스페인 사람들을 자신들의 최고신, 비라꼬차가 보낸 신성한 존재로 오인했던 것이다. 이로써 잉카는 수염을 기른 이방인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비라꼬차의 예언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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